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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을 장관 '진영 간 대립 갈등 이승만 대통령 말과 글에서 해결 실마리 찾아야'

발행 2026.07.19· 색인 2026.07.28 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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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hwpx 문서 260719 보도자료(권오을 장관 '진영 간 대립 갈등 이승만 대통령 말과 글에서 해결 실마리 찾아야')_최종.hwpx] 보도자료 보도시점 2026. 7. 19.(일) 배포 2026. 7. 19.(일) 권오을 장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진영 간 대립-갈등, 이승만 대통령 말과 글에서 해결 실마리 찾아야" - 권오을 장관, 19일(일) 국립서울현충원서 거행된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서거 61주기 추모식 참석해 국민주권정부의 “국민통합 의지” 피력 - 국민통합 차원에서 권장관, 18일(토) 윤보선 전 대통령 서거 36주기 맞아 헌화-참배, 20일(월)에는 홍기 여사(최규하 전 대통령 부인) 서거 22주기 맞아 헌화-참배도 예정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 이 "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진영간 대립-갈등을 이승만 대통령의 말과 글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권오을 장관은 19일(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현충관)에서 열린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서거 61주기 추모식 에 참석해 "광화문에는 아직도 대한민국의 앞날을 놓고 서로 다른 목소리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 에너지를 어떻게 하면 국가발전 으로 모을 수 있을까 고민"이라며 국민주권정부의 국민통합 의지 를 피력했다. 권오을 장관은 특히 "해방 정국에 국가를 이끌었던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 선생 두 분 모두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 헌신하셨고 방향과 목표도 같았지만, 방법이 조금 달랐을 뿐 "이라며 "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하셨던 말씀, 쓰셨던 글에 기초해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각 진영 간 갈등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고 강조했다. 권 장관은 그러면서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노예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는 이승만 대통령의 말씀을 가슴에 깊이 되새겨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권 장관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김구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사)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와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의 격이 없는 소통을 제안하기도 했다. (사)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회장 김남수) 주관으로 개최된 이날 추모식에는 권오을 장관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기념사업 협회 회원, 독립 유공자 유족 등 300여 명 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추모 식사, 추모사, 건국기념사 낭독, 추모 노래, 추모 합창, 헌화, 묘소참배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한편, 권오을 장관은 국민주권정부의 “국민통합 의지” 차원에서 18일(토) 오전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 서거 36주기를 맞아 충남 아산에 위치한 윤보선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아 헌화-참배 후 생가 를 둘러봤으며, 20일(월) 오전에는 최규하 전 대통령의 부인인 홍기 여사의 서거 22주기를 맞아 국립대전현충원 묘역을 찾아 헌화-참배 할 예정이다. <끝> 붙임. 이승만 초대 대통령 주요 공적 별첨.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서거 61주기 추모식 사진 담당 부서 보훈문화정책관 책임자 과 장 염선미 (04-●●●●-5530) 기념사업과 담당자 사무관 김영춘 (04-●●●●-5531) 붙임 이승만 초대 대통령 공적내용 (1949년 대한민국장) ❍ 1896년 서울에서 협성회를 조직하였으며, 협성회보와 매일신문 주필로 활동하였음 ❍ 독립협회에서 독립민권사상을 고취하고 1898년 내각 중심제 정부를 조직 하고 고종 황제를 양위시키려는 계획에 가담했다가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 으며, 감옥에서 독립정신 등을 저술하고 1904년 8월까지 5년 6개월 이상의 옥고를 치렀음 ❍ 1905년부터 미국에서 워싱턴대학 학사, 하버드대학 석사, 프린스턴대학 박사를 취득하고 1910년에 귀국하였음 ❍ 1910년 서울에서 황성기독청년회 학감 등으로 활동했다. 1913년 미국 하와이에서 한인중앙학원을 인수 운영하면서 태평양잡지를 창간했음 ❍ 1918년 12월 대한인국민회로부터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로 임명되었으나 미국 국무성으로부터 여행권을 발급받지 못해 참석하지는 못했음 ❍ 1919년 4월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되었 으며,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대표자대회를 소집하여 독립방략을 논의하고 독립의지를 세계여론에 호소했음 ❍ 1919년 8월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해 외교운동과 독립자금을 모집했고 1921년 5월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임시정부 전권대사로 한국 독립문제를 의제를 상정시키려는 외교활동을 했음 ❍ 1924년 호놀룰루에서 조직된 대한인동지회의 종신총재로 추대되었고 1925년 임시정부로부터 임시대통령직에서 면직되었음 ❍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한국 독립문제를 환기시켰으며,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 정부 구미위원장으로 미국 대통령과 국무성을 상대로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는 외교활동을 벌였음 ❍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국제연합 창립총회에서 한국대표단 단장으로 임정 대표의 참석을 요구하는 외교활동을 폈음

출처 및 이용

출처: 국가보훈부 (2026) · 공공누리 제1유형: 출처표시

공공누리 제1유형: 출처표시. 원문: 국가보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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